지금은 방송사 아나운서들의 프리랜서 선언이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나운서들의 프리 도전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아나운서들이 자신의 친정과도 같은 방송사에 몇 년씩이나 출연을 못하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프리선언을 하는데 손범수 아나운서 역시 험난한 프리 선언의 원조격이라 볼 수 있습니다.
1990년 KBS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는 사실 당시 KBS를 넘어서 방송가의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었는데요.
‘열전 달리는 일요일’,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가요 톱텐’ 등을 모두 다 진행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시절 불과 7년 만에 프리랜서를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1990년대 아나운서를 대표하는 그야말로 국민 아나운서였고 또한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방송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사실 지금 방송가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든 아나운서들의 롤 모델이자 앞으로 걷고 싶은 길이 <손범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완벽한 모습 뒤에 감춰진 진짜 인간 손범수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손범수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 손기업인데,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그는 말썽을 부리는 개구쟁이로 동생을 울리지 말라고 매번 당부할 정도로 동생을 못살게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한편 학창 시절 그는 훗날 본인이 아나운서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면 아버지는 공군 장교이자 원스타까지 올라갔던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이야기와 공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다 보니 그 역시도 군인에 대한 꿈을 꿨습니다.
그런데 대학 시절 우연한 기회로 연세대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를 하면서 한때 아나운서를 살짝 꿈꾸다가, 다시 군인이 되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공군 장교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공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뉴스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는데 그 사람은 바로 연세대 아나운서 시절 고려대 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했던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화면 속의 친구는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뉴스를 진행하고 있는데 순간 ‘나도 한 번’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고 그래서 이때 처음으로 아나운서라는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결국 ‘군인보다 아나운서가 낫겠다’고 생각해 군에서 나와 아나운서를 지원하려 했는데 그런데 이때 이미 유명 방송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한 선배가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며 그를 말리게 됩니다.
현재 아나운서의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하고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아나운서만을 생각하는 건 위험 부담이 굉장히 클 것이라고 했고 그래서 결국 선배의 조언에 따라 아나운서를 포기하고 일반 대기업에 지원해 신입사원으로 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신입사원 연수 전날 밤에도 아나운서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해서 이후 3개월 간의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가던 때 동기들과는 조금 다른 앞날을 계획하기 시작하는데, 본사로 배정받기 전 중간에 아나운서 시험을 몰래 보러 갈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회사의 본사가 방송사들이 즐비한 여의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몰래 아나운서 시험을 보겠다는 그의 계획은 충분히 그럴싸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많고 많은 신입사원 중에 극히 일부만 배정받는다는 울산 공장으로 발령받게 됩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그는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갈 상황에 처하자 억울했는지 신입사원이 겁도 없이 인사팀장에게 찾아가 자신도 본사로 발령을 내달라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울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울산 공장에서의 생활은 그저 의미 없고 답답한 나날의 연속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공장 인사부장마저 의욕 없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정말 하루하루가 괴로운 날들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내던 중 그런데 하루는 부모님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들려오게 되는데 바로 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KBS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발표된다는 것으로, 당시 그의 고민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아버지가 직접 입사 지원서를 받아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에 미련 없이 울산 공장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는 울산에 내려온 지 사흘 만에 집에 간다고 하자 당시 인사부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못 마땅히 하며 ‘어디 한번 잘해봐’라고 했고 홀가분하게 서울로 돌아온 그는 방송사 시험을 보름 앞두고 벼락치기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후 보란듯이 인사부장의 예상을 뒤엎고 그해 12월 당당히 KBS의 신입 아나운서가 되었고 그런데 이때 그는 긴장이 풀린 탓이었는지 합격 직후 대상 포진을 크게 앓아 당시 주위의 축하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누워 지내야만 했습니다.
1990년 KBS 17기 공채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 한 그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KBS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들을 맡으며 세련된 외모와 더불어 당시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깔끔한 진행으로 예능 전문 아나운서로서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1992년 전혀 뜻밖의 프로를 맡아 그간 한국 방송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패턴을 만들며 그야말로 손범수 시대를 만들게 되는데 이 프로는 다름 아닌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였습니다.
당시 이 프로는 원래 그냥 해설자처럼 동물의 설명만 하고 끝나는 설정이었는데 그런데 영상이 뭔가 심심하다고 느낀 그가 본인의 아이디어로 동물의 입장에서 말한다 생각하고 한번 애드립으로 동물 연기를 했다가 당시 PD도 재미있다고 평하여 손범수의 신들린 동물 연기가 전국에 방영되게 됩니다.
그러자 시청률이 급격하게 오르며 결국 이 프로는 KBS의 레전드 프로 중 하나가 되었고 이후에도 수많은 프로를 진행하며 KBS 간판 아나운서를 넘어 그야말로 국민 아나운서로서 정말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종횡무진 활약하며 일밖에 모르던 그에게 어느 날 운명처럼 한 여인이 눈에 들어오면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 사람은 바로 4년 후배로 들어온 지금의 아내 ‘진양혜 아나운서’였습니다.
당시 그의 아내 진양혜는 신입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름다운 미모로 KBS 내의 모든 남자들의 선망이 되었고 손범수 역시 그 중 한 사람으로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자신의 차로와 함께 카풀을 권유한 뒤 두 사람은 출퇴근을 함께 하면서 자연스레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3월에 KBS에 입사했는데 이후 손범수와 함께 출퇴근을 함께 하다 연인이 되어 입사한 지 4개월 만에 그해 7월 손범수가 프러포즈를 하자 훗날 그녀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3월에 정식 발령이 났고 4개월 뒤 7월에 손범수 씨가 나에게 프러포즈를 하길래 ‘이 사람이 미쳤나 보다’ 싶었다. 그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지 4개월밖에 안 됐는데 결혼을 하자며,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아나운서에게 결혼은 은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게 말이 되나. 날 어떻게 보길래’ 싶어 그때 ‘어떻게 보고 저에 대해서 뭘 아신다고 이러냐’며 막 따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도 모르게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되더라. 그런데 당시 외할머니가 TV를 보시다가 범수 씨를 가리키며 저 사람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맞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후 남편이 우리 부모님은 물론이고 외할머니에게도 참 잘해서 이 부분만큼은 정말 고마웠다” 라고 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그리고 이때 그의 아내는 아나운서가 유명인이 아니라 직장인이라고 생각해서 설마 은퇴까지는 안 하겠지 계속해서 일은 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당시 주위에서는 뽑아놨는데 방송은 안 하고 연애만 하냐 그리고 이제 결혼했으니까 TV는 그만해야 되는 거 아니냐 우리 때는 결혼하면 책상 치웠다. 앞으로 방송할 생각하지 말아라며 그녀를 몰아세우게 됩니다.
심지어 이때 어떤 부장은 “남편이 그렇게 다 해먹고 있는데, 너까지 방송을 하려고 하면 너무한 거 아니냐” 며 막 따졌고 이처럼 그의 아내도 힘들게 아나운서가 되어 동기들 중에서 나름 기대주였다가 손범수와 결혼을 하고 나니 안타깝게도 점점 설 자리를 잃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후부터 진양혜는 어떤 식으로든 손범수의 아내가 아닌 아나운서로서 진양혜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남편과 일하는 PD는 일절 만나지 않고 남편이 일하는 곳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의도와 다르게 진양혜가 ‘방송을 못 하는 게 남편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는 공주’라는 이상한 소문까지 나돌고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훗날 손범수가 고백하길 “내가 아내와 결혼할 무렵 흔히 얘기하는 ‘잘나가는 아나운서’로 정신없이 일하던 때였고 그러다 아내와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가지게 되고 자식도 생기면서 부모님에 대한 책임, 양가 부모님에 대한 책임 등 이런저런 생각의 폭이 넓어지면서 그게 다 무게감으로 다가오니까 당장 곁에 있는 아내의 고충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손범수의 아내라는 것 때문에 방송사 내에서 사실 그 정도로 힘들었는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훗날 아내가 나에게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하는데 남편으로서 아내의 그런 고충을 일찌감치 헤아리지 못했던 게 지금까지도 내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라고 했습니다.
이후 손범수는 이런 아내의 일과 더불어 여러 가지 이유들로 1997년 아나운서로 가장 바빴던 시기 과감하게 프리랜서를 선언했고 그런데 퇴사 이후에도 KBS와의 관계는 좋은 모양이었는지 과거 김성주와는 다르게 KBS에서도 다른 방송사들과 마찬가지로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손범수 그가 고백하길 “나는 프리랜서 전이나 후나 방송에 임하는 자세는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섣불리 방송사라는 울타리를 나올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하는데 자칫하면 일이 없어지거나 하는 경우도 생긴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했으면 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바로 긍정적인 에너지 덕분이다.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방송 활동을 꾸준히 이어올 수 있었던 원천력이다” 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