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김동건 핸드폰 끄고 잠적까지…” 방송 경력 60년에 유서까지 쓴 안타까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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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0년대 5공 시절 아나운서 김동건은 보도본부 망련회에 참석했고,그 자리에는 kbs 사장도 있었습니다. 사장은 김동건을 불러 술을 따라주며 큰 목소리로 “아나운서들은 공부를 더 해야 된다”라고 했고, 김동건은 “공부야 늘 해야 하죠” 라며 말을 받은 후 잔을 kbs 사장에게 건넸습니다.

그런데 사장이 술잔을 비우면서 “또 제발 공부 좀 하시라”고 말했고, 김동건은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 줄 알고 혹시 “제가 실수라도 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러자 사장의 말이 “아나운서들 공부 안 한다고 시청자위원회에서 이야기가 나왔어요”라고 하며 더욱 언성을 높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김동건도 “시청자위원회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kbs아나운서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10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라고 말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알고 보니 아나운서들이 공부 안 한다고 지적한 시청자 위원은 다름 아닌 탤런트 A씨였습니다.

결국 이때 A씨의 이름을 알게 된 김동건이 더욱 흥분해서 사장에게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이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아십니까? 혹시 서울대 총장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더욱 거세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결국 kbs 사장은 자신에게 망신을 주었다며 김동건에게 손찌검을 했고, 김동건도 물러나지 않고 방송국을 그만둘 각오로 사장에게 “사람 많은 데서 왜 나한테 망신을 주느냐?”며 싸우자 그 후 6개월 동안 어떠한 프로그램도 맡지 못했습니다.

1938년 북한 평양에서 태어난 김동건은 부모님이 각각 두 분인데 친어머니는 그가 3살 때 돌아가셨고, 친아버지는 6.25 때 잡혀 들어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렇게 형과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지만, 그가 늘 어머니라고 말하는 분은 낳아주신 어머니의 언니 즉 이모가 그들 형제를 호적에 입적시키고 키워주셔서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연세대 재학 중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kbs입사 시험을 2번이나 치렀지만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번 모두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동화방송국의 개국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의 신분으로 kbs에서 2번이나 시험을 치렀던 그를 눈여겨봤던 한 사람이 동화방송으로 옮겨가면서 김동건을 추천해 그는 동화방송 아나운서 1기로 입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김동건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친구들로부터 ‘아나운서는 춥고 배고픈 직업’이라는 말을 듣고 아나운서가 되는것을 굉장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딱 3년만 해보고 정말 춥고 배고프고 앞날이 보이지 않으면 어머니가 하라는 직업을 갖겠다”고 설득해 겨우 승락을 받게 됩니다. 이후 동화방송에서 1년 8개월여 일하다가 갑자기 그는 tbc로 회사를 옮기게 되고, 이후로 8여 년 동안 tbc에서 주로 뉴스를 담당하다가 사소한 갈등이 생겨서 또다시 사표를 내게 됩니다.

그렇게 tbc에 사표를 낸 후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이젠 그만할까?’고민했지만 본인이 늘 하고 싶어 했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나운서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학 시절 낙방했던 kbs에 다시 도전해 마침내 kbs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kbs에서 수많은 프로를 진행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편 김동건은 한때 골초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우다 보니 담배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은데, 하루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에 자료 화면을 내보내는 시간에 대본을 보니 자료 화면 방영 시간이 4분 50초로 돼 있는 걸 보고 담배 한 대 정도는 충분히 피울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생방송 중에 담배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료 화면에 필름이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해 당황한 PD가 진행자인 김동건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고, 결국 아나운서가 방송 중에 담배를 피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일로 심의실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자신이 들고 있던 것이 담배가 아니라 볼펜이라 우겼습니다. 하지만 방송된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누가 봐도 연기가 올라가는 게 보이자 방송을 하면서 얼마나 글씨를 열심히 썼으면 볼펜이 열을 받아서 연기까지 나겠느냐며 끝까지 억지를 부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동건 아나운서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게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해서 메인 mc를 맡은 일인데, 이 때문에 그는 1985년 무대 진행 mc이자 실향민의 한 사람으로서 예술 공연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당시만 하더라도 남북 간의 갈등이 워낙에 심했던 지라 떠나기 전 친구에게 유서까지 쓰고 떠나게 됩니다.

판문점을 통과한 남북 방문단은 각각 두 차례에 걸친 이산가족 상봉과 예술단 공연을 가졌습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북한 측의 주최로 남북이 함께하는 만찬장에서 시인 서정주 옆에 북한 인민 배우가 앉았는데 당시 서정주는 아들 뻘로 보이는 그 인민배우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정겹게 어울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흥에 겨웠던 시인 서정주가 그 젊은 인민 배우에게 “우리가 부자지간의 인연을 맺고 앞으로도 잘 지내자”고 말하자 이 인민 배우가 북한 당국에 남측에서 자신에게 서울로 귀순을 권했다고 보고하는 엄청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날 아침 김동건 아나운서가 묻고 있는 호텔방으로 함께 방북했던 정부 기관원이 찾아와 대뜸 한다는 말이 “큰일 났다 북한 당국이 서정주 씨가 한 말을 트집 잡아서 평양 방문단을 억류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 어떡하나 싶어 아찔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당시 북한에서도 서울로 보낸 방문단이 있기 때문에 북한이 우리 방문단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안심시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 당국이 김동건을 포함한 방문단에 억류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좌불안석이 되어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협상 끝에 북한 당국은 방문단 사람들을 억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억류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방문단 사람들은 긴장을 풀지 못했고, 혹시라도 ‘서울을 방문한 북한 방문단들이 먼저 판문점을 통과하면 과연 우리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후 무사히 판문점에도착했는데 그간 심각했던 분위기와 달리 당시 판문점의 분위기는 남측 언론사 기자들이 북측 지역까지 넘어와서 취재를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단 사람들은 너무 무서웠는지 내리자마자 남쪽 지역으로 넘어갔고,예술단원으로 함께 갔던 어린 친구들 가운데는 남측으로 넘어오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남한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에도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며 국민 아나운서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요무대>는 18년간 진행을 이어오며 ‘김동건이 <가요무대>고 <가요 무대>가 김동건’이라고 불릴 만큼 그에게 있어 <가요무대>는 가장 특별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지났을 시점 여느 때처럼 방송 녹화를 끝내고 대기실로 왔는데 평소 보수 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담당 국장이 그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다음 주부터 진행자가 교체되니 나오지 말라는 황당한 퇴출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통보를 받게 된 그는 당시 통보한 사람에게 “내가 오래 했으니까 언제든지 그만 둘 각오는 돼 있지만, 그래도 20년 가까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사람이 시청자들에게 인사는 해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갑자기 다리가 부러졌냐? 사고가 났냐? 내가 안 하겠다고 자빠지기라도 했냐? 왜 너희들 마음대로 이렇게 하냐?”고 했더니 통보한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쩔쩔 매게 됩니다.

그렇게 18년간 진행했던 프로에서 하루아침에 하차한 그는 속상한 마음에 전화기를 끄고 부산으로 향했고 이후 닷새쯤 지났는데 그제서야 방송국에서 한다는 말이 “감사패를 주고 싶은데 어디 있냐?”며 그를 찾자 당시 생각 같아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청자들에게 인사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방송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한편 김동건 그는 반골 기질이 누구보다 강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고백하길, “예전에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프로를 진행할 때 만난 담당 pd가 있는데나랑 친했다. 그런데 이 피디가 참여정부 때 kbs 사장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이후 kbs를 나가고 책을 냈는데 나에게 출판 기념회 사회를 맡아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흔쾌히 허락을 했는데, kbs 사람들은 아무도 안 간다고 하더라. 심지어 내가 이 pd의 출판 기념회 사회를 본다니까 당시 kbs 직원들이 하는 말이 거기서 사회를 보면 어떻게 하냐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5공 때도 이런 일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이게 군사 정부보다 나은 게 뭐가 있냐 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동건 그가 고백하길 “어떤 방송이든 사회자는 프로그램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 시청자들이 사회자를 거의 의식하지 못할 때 그 프로가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다고 본다. 출연자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사회자의 역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대화할 때 좋은 질문을 준비하는 것보다 열심히 듣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울여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벙어리도 말하게 할 수 있다. 열심히 들어주는데 왜 말을 안 하겠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덕목이 겸손과 솔직함이다.” 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