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영화로 만들어도…” 이어령 교수와 이민아, 그리고 김한길의 안타까운 사연과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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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6일 전 문화부 장관 故 이어령 교수가 향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마지막까지도 딸 이민아를 생각하며 “민아를 만날 생각, 네가 간 길을 내가 간다”고 유언을 남겼는데요.

이어령 교수는 딸이 세상을 떠난 10주기 기일을 보름가량 앞두고 별세해 안타깝게 했는데요. 생전에 냉정하게 대한 딸에게 하늘나라에서나마 아버지의 정을 전해주려고 때를 맞춰 타게 한 것이란 탄식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민아는 목사이자 변호사이며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의 딸입니다.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글을 잘 썼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할 정도로 수재였는데요.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난생 처음 아버지를 거역하는데요. 죽을 만큼 사랑하는 한 남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김한길입니다.

김한길은 국회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소설가 방송인인데요. 이민아와 만났을 당시에는 소설가로 등단을 했을 무렵이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두 사람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이민아는 아버지의 뜻을 거른 채 김한길과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 당시 스물두 살의 어린나이였지만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간 두 사람은 방 하나짜리 월세 집에서 살아야만 했고, 당시 유학생의 공식적인 취업이 금지되어 있어 가진 것 없던 두 사람은 남들이 꺼리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민아는 밤에는 주유소,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을 하였는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기에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공부하고, 돈도 벌어야 하다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습니다.

결국 결혼 5년 만에 이혼하게 됩니다. 한때 두 사람은 교포 사회에서 젊은 부부의 성공 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미국 생활 5년 만에 이민아는 로스쿨을 거쳐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지역 검사를 역임했고 이후 변호사로도 활동합니다.

그리고 김한길은 기자로 시작해 신문사의 지사장까지 되었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만 몰두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었습니다. 김한길은 훗날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민아도 한 인터뷰에서 김한길에 대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유진이를 함께 낳았고 아들에겐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라고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은 각자 재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민아는 재혼 후 2남1녀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재혼 후 잘 살아가던 이민아에게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생겨버리는데요.

김한길과의 사이에서 낳았던 아들 유진이 세상을 갑작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IQ 159의 똑똑하고 멋진 청년이던 유진이는 26세가 되던 해 갑자기 쓰러져 19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이민아는 큰 충격을 받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결국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았고 전 세계를 돌며 청소년 구제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아버지 이어령 교수를 기독교의 길로 인도하기도 했는데요. 다행히 가족들의 도움과 봉사활동, 신앙심으로 살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민아는 둘째 아들이 자폐 판정을 받게 되며 또한번의 시련을 겪게됩니다. 이민아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어 둘째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이민아에게 병마가 찾아옵니다. 세 번의 갑상선암 수술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고, 실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갑상선 암과 싸우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나 싶었더니 결국 위암 말기 판정까지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다시 일어날 수 없었는데요. 하지만 늘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며 죽는 그 순간까지 행복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이민아의 마지막 길에는 그의 남편 ‘제프 뷰캐넌’ 목사가 늘 함께했습니다. 두 번의 결혼 실패 후 신앙으로 하나된 마음으로 만난 그들은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었는데요.

이민아가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하는 동안 뷰캐넌 목사는 늘 그녀의 곁을 지켰습니다. 이민아는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1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어령 교수도 이민아의 뜻을 존중하여 딸의 죽음 앞에서 ‘그저 민아를 편히 보내주고 싶다’며 심폐소생술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김한길은 이민아와 이혼 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최명길은 당대 최고 톱스타였습니다.

고급스러운 외모로 왕후 대비, 상위층 역할을 주로 연기하던 잘 나가던 배우였는데요. 김한길이 <김한길 초대석>이라는 라디오를 진행 중이었고 그때 최명길이 초대 손님으로 나오게 되며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김한길은 그때 당시 운명적인 느낌이 왔다고 하는데요. 첫 만남 이후 김한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놀랍게도 부의금 명단에 최명길이 있었고, 김한길의 어머니가 두 사람의 결혼을 적극 추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1995년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까지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최명길은 두 아들을 낳고 같이 살고 있습니다.

최명길이 맞고 산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언론에 많이 공개하고 있는 편입니다. 김한길은 2017년 10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요.

발견 당시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되어 4기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획기적인 신약 치료로 현재는 건강하다고 합니다.

항암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항암제가 독하고 방사선 치료가 어려움이 있어 체중이 20kg 가량 빠졌다고 하는데요. 당시 김한길은 중환자실에도 3주 동안 있었고 의식불명 상태였는데 그동안 최명길은 간병인도 쓰지않고 거의 병원에서 잤다고 합니다.

퇴원 후에도 근육이 다 빠져서 넘어질까 봐 스티로폼을 온방에 붙여놓았다고 하는데요. 다행히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여 정치 생활과 방송 프로그램도 출연하고 있는 중인데요. 앞으로도 두 분 모두 건강하게 좋은 활동 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